타인의 입장을 직접 경험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물며 인간이 아닌 고래의 입장은 상상 밖의 영역이다. 김민영, 최재훈의 프로젝트 <웅장한 꿈>은 VR 기기를 이용해 간접적으로나마 고래가 되는 체험을 제공한다. 동물보호활동가 박소영은 고래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사회의 파괴성을 말한다.
#1.
피아노의 흰 건반, 사진기의 필름, 여성들의 코르셋과 가로등에 넣은 기름… 이 모든 것은 고래였다. 19세기 사람들은 고래의 뼈로 피아노 건반을, 고래 껍질에서 뽑은 젤라틴으로 필름을 만들었다. 딱딱하게 굳힌 고래수염은 코르셋이 되었고, 머리 위에선 고래 기름을 연료 삼은 가로등이 불을 밝혔다. 때때로 병든 사람들은 죽은 고래의 몸통을 파고 들어가 그 안에서 뜨거운 증기를 쐬었다.[1] 고래는 우리 문명의 바닥을 깔았다. 우리는 고래를 먹고 입으며, 고래로 몸을 씻고, 그 몸을 밟고 서서 예술혼을 꽃피웠다.
#2.
오늘날 고래는 환경오염의 꼭짓점에 서 있다. 고래는 지구를 점령한 플라스틱 조각과, 몸에 독성을 잔뜩 축적한 작은 어류들을 삼킨다. 우리가 매일 버리는 컵과 빨대, 마스크 같은 일회용품들은 땅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 제 터전을 힘차게 헤엄치던 고래에게서 미래를 빼앗는다. 이 경이로운 생명체는 커다란 몸집만큼이나 많은 양의 오염물을 차곡차곡, 성실히 몸속에 쌓는다. 버려진 낚싯줄과 정체불명의 폐어구들은 고래의 몸을 휘감는다. 고래는 몸을 결박당한 채 서서히 죽어간다. 이때 고래는 바다의 거대한 희생자다. 고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바다는, 무덤이다.
#3.
무덤은 육지에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고래가 좁은 수족관에 갇혀 망연히 죽음을 기다린다. 하루에도 수십 킬로미터를 헤엄치는 고래는 제 몸이 꽉 차는 유리관 안에서 그저 같은 자리만을 빙빙 돈다. 시시각각 찾아와 사진을 찍고 유리를 두드리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 때문에 누울 수도, 쉴 수도 없다. 지구 곳곳에 살던 100여 종의 고래는 이제 멸종되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들을 가두고 사라지게 하는 건 우리다.
컴컴하고 깊은 바닷속. 움직일 때마다 물살이 몸을 감싼다. 기포가 떠오르고, 묵직한 진동이 감지된다.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린다. 낮게 울부짖는 소리, 윙윙거리고 찰싹거리는 소리, 쿵쾅대는 소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고래들이 저마다 음성을 발산하며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있다. 관람객은 반향음으로 환경을 인식하고 친구를 알아보는 고래처럼, 귀를 열고 주위를 더듬어 본다.
이것은 고래-되기를 향한 몸부림이다. 고래의 자리에 우리를 대입함으로써 고래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거리를 좁혀 보려는 시도다. 작가 김민영과 최재훈은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를 통해 관람객에게 고래가 ‘되어 볼’ 것을 권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관람객의 시각은 외부의 청각적 자극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소리로 동료를 구별하고 먹잇감을 찾는 고래의 생태를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인간의 활동이 비인간의 영역을 어떻게 ‘다른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지를 은유한다. 상기한 것처럼, 확실히 인간은 전 영역에 걸쳐 비인간의 터전을 파괴하고 있다.
고래-되기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영영 이 동물이 되는 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심해를 내달릴 때의 그 가슴 뜀을, 수천 미터 아래를 탐험할 때의 벅참을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백 마리 고래 떼가 뭍으로 밀려 들어와 죽음을 택하는 이유 역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고래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그저 외부자다.
그러나 반대로 여기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알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한계를 더듬어 나아갈 수 있다. 〈웅장한 꿈:Big Dreams〉은 그 불가능성을 자각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1] 『고래가 가는 곳』, 리베카 긱스, 바다출판사
김민영, 최재훈(뉴미디어 아티스트)
김민영, 최재훈은 사회적 이슈를 다각적으로 재고해 보는 방안으로서 시청각적 상호작용과 공감각적 경험 환경을 구축하는 미디어 아트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본 작업에서는 고래의 감각 체계를 경험할 수 있는 청각 중심의 공간을 구현함으로써 인본주의를 넘어서 다른 존재의 관점으로 세상과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박소영(동물보호활동가, 기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0년째 기자생활을 하고 있다. 2016년 첫 고양이 토라를 만났고, 이후 길에서 만난 석수, 쇼코, 모리, 수리를 차례로 식구로 들였다. 친동생과 함께 10여 군데의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하는 중이다. 모든 동물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기를 바라며, 곧 그런 날이 올 거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