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영감 윤제원 X 이경혁] 보물에서 봉인으로의 전환

2022.3.10

기술이 가져다준 편리함은 인류를 진보하게 했다. 하지만 진보의 결과가 늘 희망찬 것은 아니다. 윤제원 작가의 프로젝트 <I barely Survived>는 게임을 통해 경고한다. 모험이 주는 아찔한 스릴이 현실의 위협으로 닥쳐올 수 있음에 대해 게임 칼럼니스트 이경혁이 말한다.

 

봉인을 열었을 때를 보여주는 옛이야기들
중국 고전소설 <수호전>의 시작은 태위 홍신이 기고만장한 채로 사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복마전(마귀가 숨어 있는 굴)의 봉인을 푸는 장면부터다. 태고의 도사들이 묶어 둔 108 마성은 호기심과 자만심에 가득 찬 인물에 의해 세상에 풀려나며 훗날 난세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상자는 인간의 근본적 욕망인 호기심과 도전에 관한 뼈있는 교훈을 오래도록 전한다. 우리는 늘 알 수 없는 것에의 궁금증을 견딜 수 없지만, 호기심의 해결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던전 디펜스의 기본구조
<I Barely Survived>는 게임 장르적 측면에서 던전 디펜스류에 위치한다. <던전 키퍼>, <이블 지니어스>와 같은 던전 디펜스는 기존의 롤플레잉 게임들이 던전을 향한 용사의 ‘모험’이라는 과정을 일반화하고 있는 점을 역으로 비튼 장르다.

던전 디펜스에서 플레이어는 용사 역할 대신 용사의 대적자 역할을 맡는다. 별다른 악을 행한 적도 없는데 다짜고짜 쳐들어오는 용사들은 던전 마스터 입장에선 귀찮은 불청객이다. 클리셰를 비틀어낸 던전 디펜스류는 용사의 도전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무뢰배의 침입으로 읽어내며, 이를 통해 고전적 롤플레잉에 대항하는 새로운 안티테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다.

<I Barely Survived>는 이러한 던전 디펜스의 기본 룰에 충실하다. 플레이어는 거대한 지하 던전을 총괄하며, 외부에서 몰려드는 ‘용사’들을 막기 위한 플레이를 진행해야 한다. 매우 단순한 인터페이스지만 몰려오는 ‘용사’들과의 전투, 각 층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자원확보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눈과 손, 머리는 생각처럼 여유롭지는 않다.

 

던전의 끝에는 보물이 아닌 위험이 기다린다
장르의 기본구조 위에서 <I Barely Survived>는 한 번의 비틀기를 더 시도한다. 게임 속 세계는 현생 인류가 이미 한 번 멸망한 뒤 다시 일어난, 이른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다. 새로운 인류는 전대 문명이 지하 깊숙한 곳에 건설한 던전 속의 보물을 열망하며 모험에 나선다. 그러나 지하에 감춰둔 것은 영원히 지상으로 나와선 안 될 핵폐기물이었고, 플레이어가 던전 방어에 실패하면 핵폐기물은 다시금 세상으로 튀어나와 종말을 맞는 구조로 게임은 진행된다.

던전이 보호하던 대상이 보물이 아닌 상황은 오랫동안 롤플레잉 게임의 대전제였던 보물 수호와 탐색이라는 개념의 근본을 뒤집어놓는다. 세상에 나와선 안 될 것을 수호하게 된 상황은 플레이어를 공의의 수호자로, ‘용사’를 탐욕에 찌든 악당으로 뒤집어내며 플레이에 새로운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당위성은 단순한 역전에 그치지 않는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이 과거에는 특정한 재화를 타인으로부터 온전하게 소유하기 위한 사적 소유에의 보호였다면, 오늘날에는 새로운 개념의 보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온칼로로 대표되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이 대표적이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 안전해질 때까지 근 10만 년을 보관하도록 설계된 온칼로 폐기물저장소는 지질학적 시간대에 달하는 시간 동안 혹시 모를 후세 인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 유명하다. 현생 인류와 언어도 문화도 달라질 수 있을 후세로부터 환경을 지키기 위해 온칼로는 비언어적 수단까지 동원하며 후세 인류가 이 위험한 물건에 닿지 못하게 할 방법을 강구하며 미래를 향한 독특한 상상의 영감을 안겨준 바 있었다.

<I Barely Survived>가 보여준 던전 수호의 역전은 온칼로의 이념과 맞닿는다. 건설자의 사익이 아니라 인류의 공익을 향하며, 얻어서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는 순간 파멸을 촉발하는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구조 안에 게임은 위치한다. 이는 게임 내적으로는 던전 수호의 당위를 플레이어에게 안겨줌과 동시에 오늘날의 인류가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 접근해선 안 될 폐기물을 어떻게 후세로부터 보호해 낼 것인가 라는 새로운 질문의 도래를 암시한다.

 

봉인, 과거에서 다시 미래로 넘어온 문제
이 질문은 새롭지만 동시에 새롭지 않다. 이 개념을 우리는 ‘봉인’이라는 단어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I Barely Survived>가 만들어내는 디펜스는 그래서 던전 수호가 아닌, ‘봉인’이다. <수호전>과 판도라의 상자는 다가가선 안 될 무언가에 대한 봉인의 이야기였고, <I Barely Survived>는 던전 디펜스를 봉인의 문제로 치환하며 오래된 미래로서의 봉인을 다시금 꺼내 든다.

인류의 발전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향한 접근으로 이루어졌다. 미지의 항로를 개척하고, 우주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온 인류는 거침없이 감춰진 세계의 비밀을 향해 왔다. 그러나 방사성폐기물로 대표되는 어떤 것들의 도래는 우리로 하여금 접근이 거부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항상 밝은 미래만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지하 깊은 곳에 봉인한 방사성 폐기물, 남극대륙 빙하 밑에 보존된 거대한 지저호의 생태계, 태양계 저 멀리 행성 암반 밑의 메탄 호수와 같이 닿지 않은 곳을 향한 모험은 언제나 인류에게 빛으로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I Barely Survived>는 넌지시 플레이어에게 질문한다. 혹시 우리의 나아감이 봉인을 풀어제끼는 것은 아니겠는가?

 

윤제원(뉴미디어 아티스트)
윤제원은 게임 랭커 플레이어와 커뮤니티 유저 매니저 등 게임에 대한 깊숙한 경험과 활동을 기반으로 이론과 창작활동을 접목하여 게임 문화의 관점으로 작업을 풀어오고 있습니다. 그는 디지털과 물리 세계, 가상과 실재를 오가는 오늘의 우리의 다층적 상황을 게임의 ‘제작’과 게임의 ‘플레이’ 행위에 대한 재고와 탐색을 통해 보다 보다 가까우면서 동시에 낯설게 제시합니다.

이경혁(게임 칼럼니스트)
디지털 게임이 매체로서 현대사회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게임 연구가이자,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게임 칼럼니스트이입니다. 게임 문화 웹진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고 주요 저서로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게임의 이론(2019, 공저)>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