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영감_아톰앤비츠 x 정우성] 2072년, 완벽한 자연의 조건

2022.3.10

크리에이터 아톰앤비츠의 프로젝트 <이완클리닉: 자연을 처방해 드립니다>는 디지털 공간에서의 휴식을 제공한다. VR 기기를 착용하면 가상 낙원이 펼쳐친다. 미래의 휴식은 어떤 모습일까? 정우성 작가의 짧은 소설은 디지털 자연이 익숙해진 세계관을 설핏 가늠하게 한다.

 

감각과 기분 중 진짜인 것은 어느 쪽일까? 마음이 느끼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을 분리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늘 가고 싶은 언덕이 있었다. 2019년 5월이었나? 어쩌면 6월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즈음의 달큰한 바람이 피부에 살짝 닿았다가 ‘사륵’ 하고 날아가던 오후였다. 오래된 흉터조차 치유할 것 같았던 바람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느긋해질 수 있구나. 이 순간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벤치에 앉아있었다.

저쪽에서는 소풍을 나온 가족이 공을 차면서 놀고 있었다. 남자아이가 힘껏 찬 공을 여자아이가 받아 다시 뻥! 시원하게도 차고 있었다.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튄 공은 아빠가 받아서 다시 넘겨주었다. 엄마는 좀 먼 곳에서 피로인지 행복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놀이하는 가족과 벤치에 앉아있는 우리 사이에 같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엄마는 눈이 부신 채 조금 나른한 자세로 앉아 흰색 꽃무늬 면모자를 고쳐 쓰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바람이 나무를 지날 때 나뭇잎끼리 내는 소리를 가만 듣고 있었을까. ‘사사사’하고 ‘스스스스’ 하는 그 소리를 영원히 듣고 싶다고 속으로만 말하고 있었을까.

먼 곳은 아니었다. 지금도 시간만 허락한다면 언제든 다시 갈 수 있는 가까운 교외였다. 하지만 마음이 동할 때마다 고쳐 생각한다. 이제 언덕이 사라졌으니 나무도 바람도 없겠지. 공을 차던 가족을 만날 일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어떤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어서. 누구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완의 조건들을 그날만큼 완벽하게 갖추는 건 이제 불가능하니까.

자연이 어디에나 있다는 건 이제 좀 순진한 착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묻겠지.

“서울에는 아직 한강의 흔적이 남아 있잖아? 산도 뭐, 있긴 있고.”
그럴 때마다 되묻고 싶었다.
“그래서 둔치에 가면 그게 옛날처럼 아름다웠어? 밋밋해진 산을 보면 마음이 느긋해졌어?”

보고 싶은 자연을 누리고 싶을 때 가까이에서 누리려고, 넉넉한 사람들은 가진 돈의 전부를 땅과 정원과 풍경에 투자했다. 기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거대한 온실이었다. 창문 안에 사계절을 담고 정원에 숲을 들였다. 대체로 2층~3층짜리 주택이었는데, 납작해서 땅에 가깝고 광활한 단층집이야말로 품위 있는 과시의 수단이었다. 땅의 크기에 따라 호수와 강을 만들어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런 집에선 향긋하고 좋은 진짜 바람이 불었다. 그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저는 집밖으로 잘 나가지 않아요. 세계 어딜 가봐도 여기가 제일 좋아요. …완벽해.”
부유함과 수줍음이 가까스로 어울리는 얼굴. 자연은 이미 귀한 자원이었다. 땅과 가까운 집의 가격은 매년 치솟았다.

나는 81층에 살았다. 거센 바람이 부는 높이라서 창문을 낼 수 없는 고층 아파트였다. 잠들기 전, ㈜아톰앤비츠가 새로 출시한 VR 헤드셋을 쓰고 의자에 기대 앉았다. 다이얼을 2019년으로 돌렸다. 5월이었나 6월이었나. 계절이 바뀌는 즈음 피부를 만지고 지나가던 그날의 바람을 만나기 위해서. 나른했던 엄마와 공놀이하던 가족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경험과 감각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부자의 정원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면서 ‘시작’ 버튼을 눌렀다. 아무것도 실재하지는 않는 채 감각과 기분만은 진짜인 밤. 나는 그날 오후의 언덕에 앉아 있었다.

 

아톰앤비츠
<스튜디오 아톰앤비츠>는 기술과 예술을 통해 비일상적인 몰입 환경을 구성하는 2020년에 구성된 2인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입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가 있는 공간연출과 관객참여형 시스템 개발을 조합하여, 온-오프라인 전시장, 리테일 스토어,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예술과 기술을 통해 일상에서 환기를 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듭니다.

정우성
미디어 스타트업 ㈜더파크의 대표이자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이자, 전 <GQ>, <에스콰이어> 에디터. 관계에 대한 에세이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요가 에세이 <단정한 실패>를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