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나: 인간-예술-테크놀로지-미래

2019.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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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은 늘 미래를 향한 열망과 호기심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훌륭한 예술가들은 모두 미래를 내다봤다. 현재 최첨단 기술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기술의 진보는 거듭되고 있다. 지금 발생하는 일,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초석이 된다면, 우리가 사는 지금을 눈여겨보는 일만으로도 미래를 점쳐볼 수 있지 않을까. 동시대 예술가들이 전망하는 미래를 살펴본다. 미래는 ‘과학 기술’이란 명분을 앞세워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 앞에 도래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않고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미래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이다.

인간과 로봇은 다르다. 그 차이점은 ‘감정’이라는 영역에서 비롯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감정>생각>행동으로 이어지는 연산과정을 반복하며 생존해 왔다. 먼저 느껴야 생각의 방향을 구조화 할 수 있고, 그 결과에 따라서 행동해 왔다. 반면 그와 정반대로 로봇은 행동>생각>감정의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먼저 주어진 프로그램 조건 아래 조립과 분류 작업 등의 기계적인 행동을 하다가, AI의 도움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단계로 진입했고, 이제는 어떻게 인간처럼 느끼고 윤리적인 판단을 할 것인가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감정’은 인간에게는 ‘생각’과 ‘행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지만, 로봇에게는 도달하고픈 미지의 목적지이다. 이처럼 출발지와 목적지가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개체의 공생을 위해 어떤 장치가 필요할까?

지난 100년, 인류는 많은 생각을 하느라 상대적으로 너무나 적게 느껴왔다. 그렇다 보니 미래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동력으로 이성, 논리, 테크놀로지를 쉽게 떠올리며, 더욱 빠른 속도의 발전을 위해 합리성, 효율성의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그 결과가 가져올 미래에 인간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최근 심화되고 있는 AI,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서 그려지고 있는 미래의 모습은 ‘축복’과 ‘공포’가 혼재된 불확실성의 풍경화에 가깝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AI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그 ‘공포’가 오히려 인간에 대한, 예술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예술은 로봇이 따라 할 수 없는 영역, 로봇과 차별화된 인간의 속성, 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해보자. 예술은 어떻게 미래를 변화시키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인간 – 예술 – 테크놀로지 -미래’로 연결되는 관계도를 그려보았다. 인간을 대변하는 예술과 미래를 앞당기는 테크놀로지가 접점을 가지고 상호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더욱 긍정적인 미래를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AI, 디지털, 로봇으로 대변되는 미래와 인간의 관계를 ‘공포’가 아닌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 이미 전 세계 주요국가, 학교, 기업, 단체들이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을 그 해결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종결합을 통해 예술이 해야 할 일이란 테크놀로지에 제동을 걸어주기도 하고,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며, 미래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즉 ‘발전’이 아닌 ‘방향’ 제시가 예술의 핵심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구축된 거대한 네트워크 초연결사회 속에서, 자연, 생명, 자아, 물리적인 신체의 문제가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길리아 토마셀로의 작품 미래의 꽃의 여신이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껏 동물, 식물, 더 크게는 자연과의 공생의 문제에 기반한 여러 작품이 있었지만,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공부한 토마셀로는 인류세(Anthropocene)의 범위를 확장해 사람들로부터 터부시되어 온 박테리아와의 공생 가능성을 제기한다. 박테리아를 인간의 일부로 해석하고 있는 작가의 리서치는 지금껏 억압받아온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며 여성의 성, 위생, 금기를 둘러싼 선입견을 허문다. 어떠한 세균, 박테리아도 용납하지 않는 통제된 멸균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항생제 남용. 그것은 약물학적, 심리적, 정책적 차원에서 다양한 부작용을 양산해 냈고 그 결과 우리는 사회 곳곳 다양한 층위에서 무너져 버린 균형을 목격한다. 그의 작품은 거대 자본의 통제와 의료/과학의 권위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여성의 몸에서 가장 은밀하고 연약한 부분과 박테리아의 상관관계를 ‘부끄럽다’는 금기어 대신 새로운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마이크로 생태계의 시작점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 해로운 세균이란 선입견이 유익한 박테리아로 바뀌고, 인간과 미생물의 공생이 시작된다.

이처럼 예술은 테크놀로지를 바라보는 관점, 테크놀로지와 연결되는 사회, 정치, 문화적 맥락, 그리고 그것의 해석 문제 등 다양한 각도의 질문과 접근법을 낳는다. 이같이 예술이 다양한 질문을 쏟아 내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닮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성과 감성이 결합한 좌뇌와 우뇌의 인지 작용을 통해 내면의 문제와 외부세계의 문제를 비교하고 관찰한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소통하기 위한 문자와 이미지를 생산하고,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논리를 구축한다. 이렇듯 인간이란 복잡한 사회적 동물의 감정, 생각, 행동을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한 창의적인 방식으로 묘사한 것이 예술이다. 그런 이유로 예술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능하게 한다. 두발자전거에 비유하자면, ‘예술’이란 앞바퀴가 방향키 역할을 해야지만 ‘테크놀로지’라는 뒷바퀴가 올바른/새로운/창의적인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상상력에 기생하며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예술(철학/미술/문학)에 의해서 증폭되고, 기호화되며 일종의 상징/메타포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루시 맥레의 작품 고립연구소는 ‘고립’이라는 극단적인 경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고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이다. 작품은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가상의 연구소를 설정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생물학적 인간의 적응, 진화 가능성을 연구하는 전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유전공학, 우주여행, 감각차단 등을 통해 인간이 테크놀로지와 만나면서 겪을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들을 고립된 한 개인에게 부여하여 적응도를 관찰하며,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의 생존 조건이 무너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게 만든다. 어쩌면 먼 미래, 인류의 모습은 찰스 다윈이 주장하듯 자연적인 진화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선택에 의해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고 거기에 맞게 진화할 수 있는 신인류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테크놀로지가 예술을 더욱 필요로 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리티에 있다. 그것은 실험실의 테크놀로지처럼 사람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동어 방법적 논리에 머물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관점에서 시대의 가치를 읽어내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예술이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리티를 분석해서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역으로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예술작품의 조건을 분석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과거에는 ‘아이디어 – 재료 – 기법 – 작품’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쉬운 조건 분석이었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점차 과정 중심, 관객참여 등 다양한 단계를 작품의 주요 요소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복잡해졌다. 주제가 아닌 관람객의 해석이, 재료가 아닌 재료가 가공되는 기법이 더 중요해졌다. 이를 보기 좋게 도식화하면, ‘주제 – 재료 – 기법/테크놀로지 – 내러티브 1 단계 – 관람객과의 인터렉션 – 내러티브 2 단계 – 사회적 영향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단계별 오리지널리티를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고민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다양한 장르와 협업하고 새로운 기술적인 실험을 감행한다. 머신 러닝에 기반 한 알고리즘을 제작하여 실시간으로 관람객들의 참여를 반영하게 하는 식으로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려 하지만 최근에는 이 역시 올드 스쿨이 되었다.

기술은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내일이면 일상이 된다. 반면 예술은 오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지만 내일이면 새로운 의미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인간 – 예술 – 테크놀로지 – 미래’라는 관계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을 닮은 예술을 이해했을 때, 미래에도 유의미한 테크놀로지가 탄생할 수 있다.

끝으로 미래 세대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다. “미래를 대비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더 똑똑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더 많이 느끼려고 노력하라. 그래야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낼 로봇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느낄 것인지 그 방법을 모르겠는가? 당황하지 말라. 예술이 그 잃어버린 감각을 깨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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