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의 동거, 미래 시대 주인공은

2019.7.9

AI 시대, 예술의 미래 & 새로운 창작 환경과 제도 마련 위한 모색

로봇에게 명령해 밥도 얼른 해놓고 옷을 깨끗이 다려놓게 한다. 로봇과 따로 말은 필요 없으며 내 명령에 예스만 답하고 유능하게 처리해내면 된다. 딱 그 정도면 좋겠지만 인간은 기능적 필요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서 더 원한다. 우리는 충실하게 육체노동으로 필요를 채워주는 로봇에서 더 나아가 지능적인 로봇, ‘재미’와 ‘교감’까지 원하게 됐으니, 그 욕망으로 약인공지능에서 강인공지능, 초인공지능으로의 시대는 열렸다.

인공지능은 가정 내에서 요리만 하는 포지션이 아니라 앞으로는 가족과 게임도 하고 대화상대도 되고 교육과 상담도 해줄지 모른다. 가지고 있는 엄청난 데이터와 처리속도로 기존의 모든 경험들을 동원해 문제마다 시원하게 답해줄 것이다. 말이 도우미지 그 능력으로 이미 집 안의 가장 결정적인 의사결정권자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인공지능이 고맙기만 할까. 오히려 이 대단한 존재로 인해 인간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 자기도 모르게 소외되지 않을까. AI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피곤한 인간관계의 과정을 가지려고 할까. 줄곧 실망시키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희망 갖기를 지속하려고 할까. 혹은 희생하려고 할까.

사회적으로 인간이 소외될 거라고 많은 이들이 예견하지만 일단 가정 내에서 더 충격적으로 소외될지 모른다.

우리는 마크 저커버그나 스티븐 핑커의 입장처럼 괜한 호들갑을 떨며 공포감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스티븐 호킹스나 일론 머스크, 앨런 튜링의 예견처럼 AI는 정말 인류종말을 이끌까?
그 사이 스티븐 핑커는 “만약 우리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실존적 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멍크 디베이트’ 토론에서. 2015)라고 초인공지능과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다.

인류 종말까지 앞서 이야기 안 해도 당장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경제적 불평등은 더 심해지고 프라이버시 보호는 어려워질 것이다. 견제장치를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새로운 기술과 부는 소수의 기업과 개인에게 집중되고, 약자는 더욱 소외될 것이다. 그 사이 창작 분야만큼은 우리만의 달란트라고 예술가는 소심하게 안심할 수 있을까.

창의성은 인간 만의 것이라고 위로받고 싶지만,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튜링’은 70 여 년 전 이미, 인공지능이 인간을 흉내내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엄청난 데이터와 처리속도, 사유와 추론을 통한 상황 이해, 많은 경험과 끊임없는 자체 학습을 거치고 또 그 정보가 저장되어 활용되니 창작의 기능 또한 가능할까. 인공지능의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인간의 마음과 마음작용에 해당하는 역할을 감당’한다면 (‘초인공지능과의 대화’, 지승도 박사의 견해를 따옴), 그 시대 감정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역할까지 하지 않을까.

인간의 출산과 인공지능의 구매 앞에서 갈등하는 사람들도 나타날지 모르겠다. 결혼은 또 굳이 왜 하나, 사려 깊고 늘 유쾌하고 잘 생긴 인공지능 하나를 구입해 함께 사는 일이 더 능률적이고 편하다는 사회현상도 일어날지도.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기계와 인간의 관계는? 예술가는 매체로든 주제든 인공지능을 작품에 활용할 것인가? 창작자는 인공지능의 일자리 침해 위협으로부터 안전할까? 놀라운 기술의 발전의 방향과 목적은 무엇인가? 왜 기술이 발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없는가? IT만 있고 CT는 없는가? 인간과 AI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AI시대, 예술의 미래 & 새로운 창작환경과 제도마련을 위한 모색’을 주제 여러 물음을 안고 ZER01NE-작가들(러봇랩, 박성민, 박승순, 양아치, 이예승)이 모였다.

러봇랩은 관상을 봐주는 AI로봇인 러봇랩과 로봇윤리헌장 기념비를 서로 마주보게 제작한 바 있다.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와 기술발달 속 윤리에 대한 논의가 지금 필요하다는 인식을 피력했다.  

인간의 욕망을 기반으로 인간의 작동메커니즘을 모방해 만들어진 AI. 인공지능은 도덕, 비도덕의 관점으로 나눌 부분은 아니다. 기술발달만큼 그것을 책임질 인간의 윤리의식이 동반되어야 하고, 견제장치를 제대로 마련, 실천해야 한다.

박성민 작가와 박승순 작가는 실용적 측면에서 AI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 작업했고, 동시에 이후 예술시장으로까지 AI의 침해를 받을 수 있을 거란 우려도 꺼내놨다.

학창시절 동료들이 컴퓨터 음악을 하는 자신을 적으로 간주했다면, 지금은 자신이 AI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고, AI 존재가 예술창작시장에도 영향을 미칠거란 경쟁자적 입장을 예감했다. (박성민 작가)  AI의 존재의 모호함과 두려움은 창작자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미래 시대엔 음악작품 표기에 제조인이 인간인가 AI인가, 분류 표기 되어 나올 것이다.  

박승순 작가는 현실의 이미지를 사운드화 하는 시도로 인공지능을 이용했다. 이미지가- 언어(단어) 그리고 소리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미지를 넣으면 단어,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면서 sound loading이 되는 작업으로, 각자의 고민에 따라 AI를 다양하게 활용 가능할 수 있음을 탐색했다.

양아치 작가는 인간, AI, 사물의 존재에 대한 질의를 던졌다. 현대자동차의 기업홍보광고물 ‘Sally’에서, 주인공 Sally는 누구일까,라는 질문과 그 진보한 자동차를 타면 (그 기술문명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로 업데이트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Sally를 통해 미래 시대의 주체가 누구일까, 사람일까 AI일까, 부의 승계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등 영상 속 많은 의미기호들을 찾아 질의. 또한 현대기술발전 속 인간은 그대로 괜찮은가,의 의문을 진지하게 던졌다.

모든 사물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미래 IOT시대 속에서 사물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신유물론이 등장할 시점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사물에도 정신이 있다는 스피노자의 입장이 마침내 실현된다. 어떻게 사회를 새롭게 세팅할지가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

이예승 작가 또한 인터넷 기반의 사물들에 집중하며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네트워킹을 작업을 통해 설명했다. 또한 모호성 혼종성의 미래시대에 일반 기승전결의 서사적 시선이 아닌 동양신화의 추상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시선도 내놓았다.

심신이 자주 고장 나는 인간, 때로 전혀 쓸모 없어 보이는 상황 속의 인간, 때로 배신하고 절망하는 인간. 때로 효용가치가 없는 일을 선택하고, 답이 나왔는데도 꾸준히 또 의심하며 물음을 만들어내는 것, 진실을 찾아가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또한 인간이다. 뭣보다 후회하고 슬퍼하고 실수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다양한 특성 중 인간은 질문을 하는 존재, 라는 게 내겐 그나마 위로가 됐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의사의 질병 연구를 돕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약 기계가 오랜기간 옳다는 게 증명되서, 의사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노엘 샤르키 NOEL SHARKEY, 영국셰필드대학교의 인공지능 및 로보틱스 교수)

기능적으로 효율적으로 더 잘 해내는가가 아니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때 인공지능에게 결정을 맡기지 말 것들에 대한 고민과 결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인간의 윤리, 인간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는 결정이다.

미래엔 인간과 기계, 인간과 인간관계도 달라질 것이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 탐구가 이뤄져야 한다. 아트와 아티스트에게 주어진 몫이 그것일 것이다. 그마저도 로봇에게 맡기면 기능적으로 답을 잘해주겠으나, 효율을 기반으로 한 ‘정확한 답’이 아니라, ‘본질 탐구에의 번민의 몫’이 ‘인간아티스트’에게 주어진 몫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