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Human]포스트휴먼시대, 인간의 존재와 가치를 뒤흔드는 의학기술의 발달

2021.2.24

인간의 몸은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인가? 포스트휴먼 시대, 발달된 의학 기술이 병원의 울타리를 넘어 활용되면서 개별 인간의 삶과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고, 나아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재규정하는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비판은 무엇인가?

(by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심지원 교수)

의학은 객관성을 담보하는 듯하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지식이나 인식의 한계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의학의 객관성이 영구적이고 확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때로는 인간의어떠한 의도 의학이라는 객관성의 옷을 입히기도 했다. 남성과 여성의 구별은 단지 존재하는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설명하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의도적으로기획하여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기도 했고(수정과정에서 난자에 조신한 성격을, 정자에 적극적인 성격을 부여한 사례), 남성의 우월성을 재검증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시도와 결부되기도 했다. 극단적으로는 우생학을 바탕으로 인종 간의 우열을 규정하려고 시도도 있었다. 반면에, 의학기술의 발달은 의학이 쌓아온 대표적인 성과(?)구분 지음 스스로해체하는성과를 이루어 내기도 한다. 의학기술이 기존의 강고한 개별 존재가 속한 집단에 근거하여 진행된구분 지음 경계를 스스로 모호하게 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향상을 목적으로 의료적 개입을 활용한 것과 연관성이 있다.

의학의 원래 목적은 고통을 완화하고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료기술은 아픈 몸뿐만 아니라건강한 에도 활용되고 있다. 고통을 완화하고 치료를 위한 목적이 아닌, 건강을 유지하거나 개인의 외모나 인지능력, 기록이나 성과 심지어는 행복이나 관계 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의료적 개입을 하는 것을 인간 증강 또는 인간 향상(Human Enhancement)이라고 정의한다. 기술이 인간 몸에 개입하는 영역은 확장되었고 정도는 심화 되었다. 장기 이식뿐만 아니라 안면 이식이나 이식이 가능하고, 나아가 몸통 이식(죽은 자의 몸과 장애를 지닌 머리를 이식시키는 문제: 헤븐 프로젝트) 대해 논하기도 한다. 피임이나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생리를 완화하거나 억제시키던 시술을 가임이 여성이 피임이나 치료가 아닌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면(가임기 여성이 생리를 하는 횟수는 400 정도이고 생리하는 기간을 모두 합치면 대략 10년이 된다), 생리는 여성의 전형적인 생물학적 특성이 아닌 선택사항이 수도 있다. 또한 로봇 팔과 같이 성능이 뛰어난 의족이나 의수의 사용으로 인해 인간은치료받을 대상에서수리받을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개별 육체의 존재 양식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개별 인간의 삶과 사회의 변화, 나아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재규정하는 문제로 전환하고 있다.

(환자의) 아픈 몸이 아닌 (소비자의) 건강한 몸에 의료적 개입을 하는 문제는 우선 의료 환경에 가지 변화를 초래한다. 첫째,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치료를 받을 때는 의사에게 의존하던 환자가 개인적 욕구나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자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의사를 서비스 제공자로 여긴다. 둘째,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긴다. 신체를 주어진 것에서 선택할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몸을 변화시킬 있고 선택 가능한 대상으로 여긴다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 몸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이가 키가 자라지 않는 경우 성장호르몬제를 시도해보지 않았다고 아이의 부모가 비판받기도 한다. 이러한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착한 몸매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착한 몸매는 몸매가 매우 보기 좋다는 말로 주로 날씬한 여성을 의미할 때가 많다(남성이 몸매가 좋을 경우는 착한 몸매보다는 짐승남과 같은 신조어를 사용한다.) 착한 몸매가 있다면 나쁜 몸매도 있을 텐데, 아마도 기준에 따른다면, 대다수가 나쁜 몸매일 것이다. 어떠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나타내는착한이라는 말이 결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일 없는몸매 함께 사용되고 있다. 착한 몸매라는 말은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셋째, 의사의 임무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유방암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방적 차원에서 유방 제거 수술을 원하는예비 환자 경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복용하는 약을 집중력을 강화시켜 높은 시험 점수를 받기 위해서 복용하고자 하고, 운동경기에서 자신의 기록을 깨기 위해서 가슴 축소 수술을 원하는의료 소비자 경우, 의사는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발달 의학기술이 병원의 울타리를 넘어 활용됨으로써 이러한 문제로 당황해하는 사람들은 비단 의사만이 아니다. 구분 짓기에 기반하여 구성된 여러 사회 환경 제도들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올림픽은 장애인 올림픽과 비장애인 올림픽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는 공정성을 중시하는 스포츠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 피스토리우스(Oscar Pistorius)처럼 의족을 지닌 장애인이 생물학적 다리를 지닌 비장애인보다 기록이 우수할 있음을 증명했다. 장애가 결핍(Disability) 아닌 탁월성(Superability)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성을 위해서 마련한 장애인 올림픽과 비장애인 올림픽의 구분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공정성을 어떻게 구할 있을까?

외에도 의족을 지닌 사람이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 의족을 분리하여 짐칸에 실으라는 부당한 요구를 듣기도 한다. 이러한 요구를 사람들은 의족이 동승자들에게 무기나 테러에 이용될 있다는 위협감을 준다는 이유로 변명을 하기도 하지만 의족과 관련한 비행기 탑승 매뉴얼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무자들은 처음 겪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의족을 지닌 사람이 제설작업을 하다가 의족이 다쳤을 경우(또는 파손되었을 경우) 의족을 신체 일부로 보는가 아닌가에 따라 실질적인 보험의 문제와도 연관이 된다. 의족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은 누군가가 의족을 가져갔을 경우, 그러한 행위는 과연 상해죄인가, 절도죄에 해당하는가와 같은 문제처럼 신체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대다수의 스포츠 종목 또한 남녀를 구분하고 있다. 역시 공정성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운동경기에서 (남성에서 여성이 ) 트랜스젠더 선수가 여러 차례 우승을 거두자, 미국 고교 여자 육상 선수 3명과 학부모들은 그들의 경기 출전을 제한해달라고 주장하였다. 그들 주장의 근거는 과거에 남자였다가 성전환 수술을 받고 현재는 여성이 트랜스젠더 선수들이 선천적인 여성들과 경기하는 것이 공정성에 위배 된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하여 인권단체 역시 경기 출전 제한은 차별이며 공정성에 위배된다고 반박했다. 양쪽의 입장 모두 공정성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으며, 문제에 관하여 여성 트랜스 젠더의 입장도 선천적인 여성의 입장도 모두 그르지 않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옮음과 그름의 대립이 아니라 옮음과 옮음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성별 이동의 가능성이 확대됨으로써 남성과 여성 경계의 모호성은 스포츠에서 남성과 여성에 대한 규정 자체에 많은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이는 비단 스포츠에서만이 아니라 남녀 화장실의 구분, 남녀 교도소의 구분, 성별에 따라 구분되는 주민등록 번호 등과 같은 사회 환경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몸을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로 인식하도록 의학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비판한다. 만약 의학기술이 기존의 휴머니즘의 잣대에서 벗어나 소수자나 비주류로 인식된 사회적 약자들의 평등과 권리를 보완할 있는 기제로 작동할 있다면, 그러한 사회에서는구분 짓기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조금은 행복해질 있을 것이다. 의학이 구분하기뿐만 아니라 해체하기에도 활용되는 사회에서는 의료적 개입을 의료적 통제로 간주하고 그러한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 주어진 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의료적 개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선택한 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할 것이다. 주어진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몸을 선택한 사람들은 낯선 존재들이고 그들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낯선 존재이고 그들이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낯설고 새롭게 등장할 수많은그들끼리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없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지적 호기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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