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Freak Show] 현대미술가 옥정호, 이 시대의 프릭은 누구인가

2021.2.24

(작품설명)

사진과 영상을 활용해 사회 문제를 제기해 현대미술가 옥정호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비정상인을 무대에 올려 관람했던 오락물프릭쇼(Freak Show)’ 차용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추한다. 단편 영화 <Freak Show 2020> 주인공은 작가의 지난 작업 <미망인(迷妄人)> 시리즈에 등장했던 동강 신체를 지닌 남자로, 이는 옥정호 자신이기도 하다. 여기에 나오는 몸이 잘리는 인부는 주체적으로보기 원하나 여전히 객체로서보여지고있는, 작가 자신으로 재현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Freak Show 2020> 옥정호 작가의 페르소나가 토막 신체를 지니게 되기까지의 전사를 다룬다. 이야기는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또한 환상적이다. 마술사의 공연을 위한 무대 공사 현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사를 위해 동원된 비정규직 인부는 무대 마술사를 흠모한다.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한눈을 대가로 그는 손가락을 잘린다. 마술사는 마술로 인부의 손가락을 붙여주지만, 인부가 무대에 서고 싶어 하자 몸을 동강 것을 제안한다. 인부는 몸을 자르는 고통을 감내하지만,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는 마술사에게 집중될 뿐이다. 인부의 동강 몸은 서로를 의지하며 강가로 나가 나란히, 속절없이 앉는다. 사람 아닌 사람의 곁에 무지개가 떠올라, 환상인 과거인 모호한 미장센이 연출된다.

영화에는 마술사를 위한 무대 공간이 등장해 액자형 구조를 이룬다. 배역들, 공적인 역할들의 활동의 공간인 동시에 온갖 환상들의 장소인 마술연극의 무대는 정체성의 분할을 혼란에 빠뜨린다. 혼란 속에서, 과거 폭력의 장치였던 프릭쇼(freak show) 무대는 능동적인 상연의 공간이 된다. 영화는 무대 드랙(drag) 퍼포먼스로 시작하고, 무대는 마술사에게로 넘겨진다. 무대는 인정받은 자들, 완성된 자들의 세계다. 인부는 무대 위의 세계에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환상의 세계에 여전히 작동하는 현실의 논리는 더욱 파괴력을 발휘한다. 인부는 동강 미완의 몸으로 그들만의 무대를 떠나 강가로 나온다. 완성된 자들의 약속된 세계에 들어가는 대신 현실의 누추한 자리에 머무르는 편을 택한 것이다. (by 우아름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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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호 현대미술가
우아름 평론가
김성우 큐레이터

Freak Show: 아이디어의 시작

우아름: <DIVERSITY> 번째 주제는 미래 환경에서의 인간성을 고민해보기 위해멀티 휴머니티 선정했다. 옥정호의 영상 작품 <Freak Show 2020> 통해 기이함을 무대에 올리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 관해 이야기 나누면서 오늘날의 인간성이 다뤄지는 모습을 조명해보려 한다. 먼저 <Freak Show 2020> 콘셉트를 어떻게 정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제로원의 주제 제안을 듣고 선정한 것인가?

옥정호:프릭쇼 이전부터 구상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휴머니티에 관한 이야기인데, ZER01NE 테마와 맞아떨어졌다. 당시 우연히 유튜브에서 <Let 美人>이란 프로그램을 보고 충격을 받아 밤을 새우며 여러 편을 이어봤다. 출연자 외모의 결함을 마치 괴물을 대하듯 과장해서 표현하는 방식이 아주 기괴했다. 특히나 화면 연출이 과거 300 전에나 있었던프릭쇼 동일해 보였다. 기형적인 사람들을 한데 모아 구경거리로 보여주거나 서커스 곡예를 하곤 했던 쇼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방송은 이상한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기도 했다. 출연자들은 저마다 비관적인 처지를 털어놓고, 값비싼 성형 혜택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으며,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때 성형외과 의사와 정신과 의사들이 나와 전문적인 조언과 해결책을 내놓는데. , 모습이 마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박사들 같았다. 알고 보니 애초에 논란이 많았던 프로그램이더라.

우아름: 그러고 보니프릭(기이함)’ 이용해 주목도를 끌거나 이익을 도모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과거나 지금이나 다를 없어 보인다.

옥정호: 맞다. 이런 사람들을 이용하는 매체가 사악하다고 있다. 17세기 중반, 만약 샴쌍둥이가 프릭쇼에 오르지 못했다면 굶어 죽었을 테다. 그들은 어쩔 없이 본인들의 기형적인 모습을 팔아 연명했던 거고, 서커스 단장은 그들을 무대에 올려 부를 축적할 있었던 거다. 이러한 패턴이 프릭쇼나 지금의 방송 프로그램이나 똑같은 구조라고 있다. 어찌 보면 요즘 방송 중인 예능 프로그램 <골목시장> 별반 다르지 않다. 성형외과 의사가 백종원으로 바뀐 셈이니까. 여기엔 항상 뭐든 잘하는 식당이 있고, 말을 해도 절대로 고쳐지는 빌런들이 존재한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한편, 빌런은 기본적으로 낙인효과다. <Let 美人> 출연자들의 모습을 흉측하고 기괴하게 포장할 수록 사람들은 빠져드는 거다. 우리 사회에서 특정 지역 출신을 낙인을 찍어 취급하는 것도 동일한 얘기라고 있다.

Freak Show: 우리 사회의 프릭쇼 프릭들

우아름: 옥정호 작가는 그간 신체적 가해를 입고 작품 속에 등장하곤 했다. 가해의 정도는 점점 심해져 동강 몸이라는프릭 형상에 이르렀다

옥정호: 스스로 몸을 자른 박스 속에 들어간, 동간 신체의 남자가 . 동시에프릭이고. <골목식당> 주인들과 <Let 美人> 사연을 신청한 사람이인가? 맞다. 내가 주인공이 되면 의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김성우:프릭쇼라는 것은 특정 인간을 비정상적 존재로, 보통의 인간이 아닌 존재로 타자화시켜버리는 것이다. 기존의 옥정호 작가의 작업에서 과연 작가가 그들의 타자화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있겠느냐, 이런 논지의 질문을 던졌을 , 옥정호 작가는 작업에 자신을 등장시킴으로, 스스로를 희화화함으로 그것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있는 아닌가 생각했다. 한편으로 그것이 작가로서 있는 최소한의 윤리이고, 타자화로부터 어느정도는 자유로울 있는 일종의 알리바이를 갖게 되는 아닌가 생각했다. 작가가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서 기호성이 0 되는 거라고 생각할 있다.

한편, 프릭쇼 무대를근대성 연결시킬때, ‘인간적인 ,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 대해 질문할 있다. 과거 영국에서는 다산의 상징인 비너스와 닮아있는 식민지의 흑인 여성을 데려다가 사고팔기도 했다. 그들에게 식민지의 흑인 여성은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 그대로 타자화된 존재들이니까. 근데 옥정호의 영상에서는 묘하게도프릭이라고 보여지는 캐릭터들이 굉장히 주체적인 위치를 갖고 있더라. 나한테는 이게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반대로 무대를 만들고 있는 정상적인 외관을 가진 노동자들이 한편으론프릭같이 보이기도 했다. 노동자는 결국 무대 위의 도구가 되는데, 이는 결국 인간의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했다고도 있다. 그래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흘리는 눈물이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이들은 인간인가? 프릭이 되었지만, 프릭이 아닌 존재다.

Freak Show: 주체성을 가지려면

우아름: 작품 속의 프릭쇼 무대에는 노동자, 마술사, 환자, 광대, 예술인이 오른다. 오늘날의 무대는 착취와 성취가 뒤섞인 곳이기도 해서, 어떤 기이함은 주체적인 것으로도 보인다. 작품 오프닝 드랙퀸의 등장부터 이러한 이중성이 흥미롭게 드러난다. 드랙퀸은 소수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자로서 등장해 혼란을 주는데, 이후 장면이 전환되면 그가 무대라는 성취의 공간 위의 성공한 존재인 셀럽(celebrity)이라는 있었다.

김성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체성의 획득인가?,라고 질문해볼 있다. 사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무대 위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정말 주체적이냐, 라고 물었을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쩔 없이 굉장히 많은 알리바이들을 만들어가면서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를테면, 예술 영역에서도 예술가는 제도를 비판하고, 사회를 비판하고, 실험하고, 기존에 만들어진 전통들에 도전하지만, 결국 실험과 비판은 다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어 외연을 확장하는 기능을 하게 되고, 그렇게 예술가는 다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는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과연 이것이 주체적인가, 라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과거의 프릭쇼처럼 이분법적인 논리는 아니다. 무대 위의 프릭이라는 존재들이 있고, 밑에 있는 외형상 프릭이 아니지만 프릭의 지위에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구조가 굉장히 흥미롭다. 무대를 만드는 노동자들은 정상적인 연기를 위한 무대를 만들고,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존재들은 프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정작 프릭은 아니다. 이렇게 비정상으로 존재하는 , 그리고 비정상이 만들어지는 것들이 오늘날의 어떤 공동체 구성 원리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아름: 드랙퀸의 경우를 통해 주체성에 대해 생각해볼 있을 같다. 보통 무대에 오를 때는 자기 자신을 떠나서 과장하는 제스처들이 있는데, 드랙퀸은 본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줬던 같다. 의상이나 , 화장에서 드랙퀸 댄서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는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 사회의 주목도를 끌기 위해 약간은 특이한 부분, 예전 같으면 비정상으로 읽힐 있는 부분을 자신이 소화할 있는 선에서 책임지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주체화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무대 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등장할 있었던 아닐까?

옥정호: 영화 <파이트 클럽> 보면 애드워드 노튼의 환상이지 않나. 사실은 주인공들은 나의 환상처럼 보여지면 좋겠다, 캐릭터들은 나를 이루는 캐릭터들이고, 결국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데 혼자 보는 환상처럼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다,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런 부분 때문에 방금 말했던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겠다. 한편, 드랙퀸 댄서는 어떻게든 중화시켜서 표현하고 싶었다. 드랙퀸 춤을 추는 아니라, 자기애와 자기혐오를 동시에 표현해달라고 연기자에게 주문했다. 5:5 아닌, 6:6으로 연기해달라고.

우아름: 마술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있다. 기이한 자들에게 무대를 제공하는 자로서 과거 프릭쇼로부터 현재의 <골목식당>이나 <Let 美人> 같은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무대를 제공하는 것은 마술사이지 않나.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타인을 통해 이익을 취하거나 자아실현을 한다고 생각할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환상일 뿐이고 영원히 변화하지 못하는 ,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옥정호: 남상수 작가를 마술사 연기자로 섭외한 이유는 그가 타락한 종교 지도자 같은 이미지가 있어서다.

김성우: 나는 그를 전형적인 자본가의 모습으로 생각했다.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무대를 지속하기 위해 내부의 규칙을 바꾸고, 그를 통해 끊임없이 착취할 있는 구조를 유지한다. 완벽한 주체라기에는 무리가 있고, 초월적인 존재로 보기도 어려우며, 굉장히 세속적인 존재라고 있다.

우아름: 그렇다면 삶으로 다시 돌아왔을 마술사의 시스템을 어떻게 활용하거나 개입하느냐의 문제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같다. 무대에 오른 프릭들에게나 오르고 싶은 노동자들에게나. 결국 내가 어느 공간을 무대로 설정할 것이며, 어디에 위치할 것이냐는 문제와 닿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마술사가 주체성이 없다고 느꼈던 부분은 이미 짜여있는 룰을 그대로 실행하기 때문이다.

Freak Show: 정상과 비정상 

우아름: 요즘은 기준이 외부로부터 명확하게 주어지기보다는 개인별로 내면화된 같다. 그게 드랙퀸이 나한테 건넨 질문이기도 하다. 영상 작업을 보면서 어떤 개인은 비정상성 혹은 기이함을 굉장히 활용하는 수준까지 가면서 건재할 수도 있지만, 어떤 개인은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떨 무너질까 하는 생각도 해보다가 내가 어디가 무대이고, 내가 무대에 있는지, 나로서 있는지 분간할 없을 무너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걸 알아채기 어려운 요즘의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유튜브라든지 SNS 굉장히 많고 그러한 무대에서 자신을 내놓으며 연기하듯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성우: 옥정호 작가의 프릭쇼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같다. 프릭쇼는 기이한 사람들의 쇼로, 무대에 서는 이들은 비정상적인, 기이한 사람들이다. 한편, 무대를 만들고 있었던 사람들은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외형을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무대에 오르길, 기이하길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인 것이다. 앞으로 어떤 기준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눌 있을까, 혹은 정상과 비정상이란 구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Freak Show: 마지막 장면의 의미

우아름: 김성우 큐레이터가 하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탈출구가 어딜까? 생각이 것이다. 마지막 장면을 우리가 어떻게 있을까? 결국은 무대라는 공간을 흠모했던 노동자가 몸이 잘렸지만 원했던 스포트라이트는 하나도 받지 못하고, 그냥 속절없이 바깥의 공간으로 나와서 잘린 몸으로 덩그러니 앉아 물가를 응시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김성우: 가지의 레이어로 보자면 결국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의 주인이 되지 못한 . 근대의 개념으로 봤을 인간화되지 못한 것이거나,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 그리고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주권을 획득하지 못한 존재로서 결국엔 도구화된 , 타자화된 존재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누군가 요가를 하지 않나. 장면을 보면서 그가 원했던 어떤 자유로운 몸짓이 눈앞의 신기루처럼, 상상의 영역 안에서나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생각해보게 됐다. 한편으론, 이게 옥정호 작가 자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텐데, 그래서예술가의 같은 것을 거기서 보기도 했다. 결국에는 옥정호 작가는 무엇을 위해서 이런 작업을 했는가? 결국 오늘날 예술가란 무엇인가? 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옥정호: 사실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이 나의 환상이고, 무지개 인간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냥 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의도했다.

우아름: 처음에는 노동자가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실패한 자로서 공간을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나의 위치를 다시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흠모하던 세계의 바깥에 나와서 물가를 바라보는 장소와 시간을 마련한 것이라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만의 위치로 가기 위한 시공간에 있다는 것을 무지개가 보여주는 수도 있겠다.

Freak Show: 옥정호의 넥스트 챕터

옥정호: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제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해소되었다고 해야 할까? 앞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타이밍이다

우아름: 몸까지 동강으로 잘랐는데, 다음은 무엇일까 염려했다. 다행이다.

김성우: 옥정호 작가의 작업은 급진적인 부분이 있다. 항상 전복구조가 있다. 희화화나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지만, 사실 보면 사회 구조를 작업 안에 담아내고, 결국 구조를 뒤엎는다. 블랙 코미디처럼 웃음을 터트리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함에 불편함을 더해서 어쩔 없이 인정하게 하고, 결국 불편함의 끝에서 해소할 수밖에 없는 카타르시스를 준다. 결국 불편함과 그것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가 작업에 공존하며 존재하는 같다.

우아름: 옥정호 작가의 작품은 우화 같기도 하다. 시대에서 직면해야 우화. 그럼, 앞으로 작업에 직접 출연할 예정인가?

옥정호: 아니, 같다.

김성우: 출연하는 것과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 같다.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인 같다. 미술은 어쩔 없이 대상화를 시킬 수밖에 없고, 거기서 작가가 어떤 윤리적 관점과 태도를 취하느냐가 문제이다. ‘윤리는 미래의 미학이다라는 말이 있다. 윤리는 사실 미학과 분리가 없다. 나는 옥정호 작가의 작업을 봤을 대상을 타자화 시키는 상황에서 본인의 등장이라는 장치를 통해 대상화의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소를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의 작업에서 그런 장치들이 빠진다고 했을 , 다른 작업으로 보일 같긴 하다.

우아름: 작가가 작업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탄광 속에 내려보내진 카나리아 같은 느낌이 있었다. 뻘밭에서 요가를 하던 시절부터 2019년까지, 스스로 작업 속에 등장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옥정호 작가의 발언이었다. 몸을 엉망인 세상에 직접 넣어 세계의 참혹을 보여준다는. 프릭쇼에서 방울 눈물을 흘렸을 거기서 이야기, 혹은 감정의 종결이라고 할까? 마침표를 찍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옥정호 작가가 영상을 떠난다는 것이 나한테도 위로가 있을 같다. 이제 많이 어두운 터널은 지나왔다는 사인같이 느껴진다는 거다.

김성우: 작업에 직접 등장하는 옥정호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방식도 좋지만, 작업의 밖에서 삶의 일원으로 시선을 담아내는 정도의 위치도 나쁘지 않을 같다. 하지만, 급격하게 작업의 밖으로 떨어져 나오기가 힘들다면, 작업 안에서 어떤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로 등장하기보다는 마치 어떤 문장에서 구두점같이 쉼표나 마침표처럼 존재하는 역할로도 충분할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