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와 디지털로 짜여진 시스템에서 탈주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 실험

2019.5.16

“젊은 세대 사이에서 ‘탈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나라를 탈출하고 싶지만, 정작 탈출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회자된 단어였다. ZER01NE 크리에이터 프로젝트팀 Pink Nation이 국가에 빗대어 설정한 ‘탈주의 공간’은 스마트시티와 같은 국가 주도의 기술 시스템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시도하고, 방문자들의 일상 모드를 전환하는 데 집중한다.”
ZER01NE 크리에이터들은 창작의 두려움이 없는 듯하다. 무엇이든 실험하고, 일단 만들어본다. 크리에이터 김나희, 옥정호, 황문정이 모여 만든 프로젝트팀 Pink Nation은 국가 건설을 시도했다. ZER01NE DAY에서 공개한 프로젝트에 관하여 크리에이터 황문정에게 귀띔을 청했다.
Q. 프로젝트 Pink Nation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A. 우리는 ZER01NE에서 처음 만났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백그라운드를 가졌지만, 매터리얼보다는 네러티브에 관심이 많고, ‘반 데이터’ 적인 행위를 실천하고 싶은 공통점이 있어 함께 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데이터는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하여 삶을 좀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반해 Pink Nation은 즉흥적이며 예측이 힘든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하며 국가를 건설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갈등 양상, 이상과 현실의 괴리 등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를 위해 실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땅을 구입하기도 했다.
Q. ‘pink’와 ‘nation’의 낯선 조합이 궁금증을 유발한다. 왜 핑크인가?
A. 오래전부터 핑크색는 여성의 색, 사랑의 색 등 사회적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최근 젠더가 유연해지며 핑크색 남성복이 등장하는 등 핑크색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례가 늘고 있다. 우리는 시대가 바뀌면서 핑크색이 함의하는 개념의 변화가 흥미롭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풍경을 제시할 국가를 만드는 시도와 부합하여 ‘pink’와 ‘nation’을 조합한 프로젝트명을 떠올렸다. 특히 우리나라 시골에서 쉽게 찾기 힘든 색이 핑크색인 점도 중요했다.
Q. 만 년 후의 나라를 상상하며 국가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만 년이라는 시간은 아득한 훗날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Pink Nation에게 미래의 국가는 어떤 모습인가?
A. 우리는 흔히 미래의 국가를 상상할 때, 각종 미디어가 입력한 이미지로 제한적 상상을 하게 된다. 보통은 AI와 데이터가 지배하는 첨단 국가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가? 하지만 만년이라는 먼 미래는 어쩌면, 마치 리셋버튼을 누른 것처럼 아주 태초에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Pink Nation은 땅이라는 틀만 있고 텅 비어있는 국가나 다름없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은 Pink Nation의 방문객들에게 판단을 맡기고자 한다.
Q. 프로젝트 진행 방식이 궁금하다.
A. 세 명이 삼권을 분립하여 서로를 견제하며 의사결정을 내린다. 모든 결정은 세 명의 논의를 거쳐야 하고, 만장일치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실행한다. 누군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을 때,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의결이 무산되기도 하고, 설득을 통해 안건이 통과되기도 한다. 실질적인 업무 분담은 각자의 작업 분야를 살렸다. 옥정호는 사진과 영상 기록을, 김나희는 영상 기록과 편집을, 황문정은 입체 설치를 맡았다. 현재 국기와 외교 의상은 완성했고, 구입한 땅에서 진행될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Q. 프로젝트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 혹은 생각의 전환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A. 처음에는 6개월이라는 짧은 프로젝트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진행하고 싶었다. 그러나 국가의 토대를 닦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면서 과도한 장치가 오히려 방문자에게 제한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개념에 비춰볼 때 지속성 있는 국가보다 신기루처럼 하루 동안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국가가 더 적합할 것으로 판단했다.
Q. ZER01NE 상해 필드 트립을 통해 Pink Nation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문했다. 어떤 인사이트를 발견했는가?
A. 다른 나라를 방문한 경험은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삶을 천천히 돌아보게 만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방문은 우리에게 정체성의 전환을 일으켰다.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방향을 재고하고, 향후 디스플레이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로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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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A.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녔다. 우리의 예산과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킬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긴 여정 중에는 회의를 진행하며 국가 건설을 위한 여러 조건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땅을 구입하는 과정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문제점이 많았다. 갑자기 길이 없어지고, 땅이 계곡에 걸쳐있기도 했다. 공동명의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준비할 서류도 복잡했다.
Q. 프로젝트의 결과는 어떻게 보여주었나?
A. 땅을 찾아다니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과 땅을 구입하고 나서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영상, 이렇게 크게 두 가지 영상 작업으로 나누어 선보였다. Pink Nation의 국기와 의상, 외교문서 등은 전시장 한편에 디스플레이 되었고, 외부에는 약 4-5미터의 모스크가 상징적인 조형물로 자리했다.